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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과 낚싯대(떠나보내는 연습)

by 남반장 20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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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은 낚싯대를 쥔 손끝까지 파고들어와 오래된 감정을 흔들었다. 붉게 물든 갈대숲은 낚시터의 경계를 부드럽게 감쌌고, 그 너머로 흘러가는 물빛은 지나온 계절처럼 고요하고도 어두웠다. 나는 낚싯대를 폈고, 찌를 던졌고, 그 물살 위에 가만히 나를 올려놓았다. 입질이 없던 아침, 마음은 점점 먼 곳으로 떠돌았고, 찌는 이따금 가을빛에 반짝이며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언제나 이토록 막막한 일이었다. 낚시는 언젠가 올지도 모를 움직임을 향해 끊임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일, 영영 아무것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체념 속에서도 찌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낚시란, 삶을 견디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붙들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사랑을, 어떤 이는 꿈을, 어떤 이는 지나간 시간을. 그리고 나처럼 낚싯대를.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오래전 떠나보내지 못한 누군가를 조용히 떠올린다.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그 얼굴, 바람이 한 번 세게 불어올 때마다 마음도 함께 뒤집히곤 했다. 떠나간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남겨진 기억은 너무도 많아서 늘 나는 그 중 하나쯤은 놓지 못하고 살아왔다. 오늘처럼 바람이 맑고, 갈대가 흔들리고, 물속이 깊고 차가운 날이면 특히 더. 나는 찌를 보면서 그 사람을 떠나보낸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으로 보냈다가, 다시 불러오기를 반복하며, 오늘도 그런 연습을 한다. 낚싯대 끝에서 사색이 길어지는 이유는, 아마 이 끝나지 않는 작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질은 없다. 찌는 조용하고, 바람은 등을 쓸고 지나간다. 낚시는 이렇듯 고요 속에서 자신을 마주보게 한다. 도시의 삶은 우리를 끊임없이 어떤 존재로 만들어내려 한다. 우리는 일을 하고, 관계를 맺고, 성과를 내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자리, 낚시터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앉아 있으면 된다. 기다리면 된다. 어떤 날은 손에 쥐는 것이 없고, 어떤 날은 지나친 바람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나는 바람을 타고 갈대숲이 몸을 비트는 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도 그렇게, 비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꺾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망가져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허락하는 것. 낚시는 언제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못난 날에도, 고요한 날에도, 마음이 부서진 날에도. 낚시터는 그런 것들을 가만히 품어주는 깊은 품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면에는 빛의 결이 바뀌었고, 나는 어느새 햇살의 길이를 보며 하루의 흐름을 짐작했다. 어쩌면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람의 결, 빛의 각도, 물결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느낀다. 지금 이 시절이 어디쯤인지. 누군가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 나는 낚시를 하면서 사랑을 떠올리고, 미련을 놓고, 때로는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흐르게 했다. 물고기를 기다리는 척하며, 사실은 나 자신이 다시 걸려들기를 바라는 마음. 낚싯대 끝에서 움직이는 것은 물고기보다도 내 내면의 가장 연약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해는 느릿느릿 저물어갔고, 수면 위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마치 오래된 슬픔처럼 퍼져 있었다. 오늘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빈손이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음은 자유로웠고, 찌의 미동조차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많은 것을 건져올렸다. 그것은 생각이었고, 기억이었고, 다정한 슬픔이었다. 낚시는 그렇게 매번 나를 비우고, 다시 채우는 의식이다. 떠나보내는 연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을 바람 속에서 나는 천천히 그 연습을 이어간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이별의 감정,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손을 흔드는 법. 나는 이 낚시터에서, 또 한 번 삶을 배운다.

돌아오는 길, 갈대가 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길을 인도해준다. 저마다의 방향으로 흔들리는 그 모습은 마치 모든 인생이 각자 흔들리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나도 그 흔들림 속에서 나름의 리듬을 찾았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준비를 했다. 비록 찌는 끝끝내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오늘도 낚시를 하러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모든 것이 있었던 하루. 그렇게 또 한 계절, 나는 낚싯대를 쥔 채 서서히 떠나보내고 있다. 사람을, 시간들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용서하지 못한 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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