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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앉은 나무처럼 – 흐르는 시간과 낚시의 노인

by 남반장 202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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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가 옅게 퍼지는 새벽 강가, 이른 시간부터 자리를 잡은 한 노인이 있었다. 낡은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댄 채, 긴 낚싯대를 거머쥔 그의 손은 오래된 나무뿌리처럼 굵고 거칠었으며, 눈빛은 마치 저 강의 흐름을 전부 읽고 있는 듯 고요하고 멀었다. 나는 그날 우연히 그와 몇 미터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말을 걸기엔 그의 침묵이 너무 단단해 보였고, 다만 그의 존재가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서, 나도 조용히 따라 침묵했다. 아침 햇살이 물 위에 비치기 시작할 즈음, 그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의 옆모습에서 세월이라는 이름의 풍경을 보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날을 이 강가에서 보냈을지,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놓치고, 또 얼마나 많은 기억을 이 자리에 묻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등은 말하고 있었다. 나직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나는 여기 있었다”고.

그는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낚싯대가 떨릴 때마다 나도 긴장했고, 그의 손이 미끼를 꿰맬 때마다 나도 조심스레 손을 움직였다. 시간은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흐르며 익어갔다. 찌는 그리 자주 움직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초조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언가 잔잔한 위로가 느껴졌다.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집 마루에 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낚시를 처음 시작했던 날이 떠올랐다. 강은 지금보다 더 맑았고, 나무는 더 푸르렀으며, 나는 세상에 대한 기대와 불안 사이를 오가며 앉아 있었다. 그때는 붕어 한 마리만 낚아도 가슴이 뛰었고,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찌가 잠잠하다고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낚이지 않는다고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림 속에서 시간을 보는 법을 배웠고, 고요함 속에서 나를 마주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 노인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손끝에는 세상의 성급함이 없었다. 그의 호흡에는 오래된 느림의 미학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허리를 곧게 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붕어 크지. 요즘엔 좀 뜸하지만.” 나는 놀란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엷은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말을 잇지 않았고, 나는 묻지 않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더 앉아 있던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낚싯대를 접고, 오래된 가방에 도구들을 넣은 그는 다시 한번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여기 계속 있을 건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 뒷모습은 마치 강가의 버드나무처럼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던 존재가 서서히 물러나는 것 같았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의자도, 물건도, 흔적도. 그러나 어쩐지 그의 숨결 같은 것이 내 주변에 머무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자리에 자주 앉았다.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는 종종 그를 떠올리며 물 위를 바라보았다. 인생이란 어쩌면 그렇게, 누군가의 존재가 남긴 무언의 온기 속에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낚시는 물고기를 기다리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떠올리는 의식이기도 하다. 나는 낚시를 하며 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함께 붕어를 낚던 친구, 고요한 아버지의 뒷모습, 손을 꼭 잡고 따라오던 아이의 웃음소리. 그 모든 순간들이 물결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찌를 바라보며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고, 물결에 스치듯 사라지는 기억 속에 잠겼다.

낚시는 시간을 재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비워내는 그릇에 가깝다. 그 속에 사라진 것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얼굴들, 그리고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가만히 내려앉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들을 끌어올린다. 마치 낚싯대를 천천히 당기듯. 낚시터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간다. 말없이 앉아, 말없이 흘러가고, 말없이 기억된다. 나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있다. 그 노인이 그랬듯, 조용히 물 위를 바라보며 찌 하나를 띄운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노인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한 자리를 오래도록 지켰던 사람으로, 물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했던 사람으로. 그 생각을 하니 문득 마음이 따뜻해졌다. 낚시는, 그 자체로 사람을 닮아 있다. 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고, 고요하지만 깊고, 아무 말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존재.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물 위의 찌처럼, 바람에 흔들려도 가라앉지 않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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