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얼어붙은 강 위로 겨울 해가 막 떠오르려는 시간이었다. 어둠과 빛 사이, 무채색의 시간 속에서 나는 홀로 강가로 향했다. 발밑으로 밟히는 눈 소리는 유난히 또렷했고, 호흡 사이로 흩어지는 김은 바람 속에서 금세 사라졌다. 낚싯대를 메고 얼음판 위로 나설 때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이 어느 순간부터 단순히 낚시를 향한 발걸음이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를 다시 꺼내려는 여정이라는 것을 느꼈다. 얼음은 두껍고 단단했지만 그 위를 걷는 마음은 늘 조심스러웠다. 마치 지나간 기억 위를 걷는 것처럼. 무게를 실으면 꺼질까 두려운 기억들이 얼음 아래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 몸을 내려앉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은 찬 공기 속을 가르며 얼굴을 스쳤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내 마음의 얼룩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얼음 구멍을 뚫고 낚싯줄을 드리우는 그 단순한 행위는, 어쩌면 깊은 심연 속으로 손을 뻗는 것과도 같았다. 물고기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그 공간은, 마치 내가 잊고 지내던 기억들의 저편처럼 불확실하고 흐릿했으며,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낚시가 시작되고, 나는 더 이상 세상의 소음을 듣지 않았다. 내 앞엔 오로지 얼음 위에 얹힌 작은 찌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나와 이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졌고,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표처럼 느껴졌다. 낚시를 하며 나는 자주 생각에 잠겼다. 특히 이렇게 겨울 강가에 앉아 있으면, 내 삶의 많은 장면들이 한 겹, 한 겹, 얼음 위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얼음낚시를 처음 나왔던 날, 바람이 너무 매서워 손가락이 저렸지만 그가 내 손을 꼭 잡아주며 “기다림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했던 순간. 스무 살의 겨울,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설어 누구와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얼음 위를 걷던 기억. 그때의 나는 세상이 너무 넓고 나는 너무 작게만 느껴졌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 그 모든 시간들을 지나 이 자리에 다시 앉아 있다. 그렇게 나는 낚시를 통해, 시간을 되짚고, 사람을 떠올리고, 내 안에 얼어붙은 감정을 조금씩 녹여내고 있었다.
물고기는 잘 낚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얼음 구멍 너머에서 들려오는 찰랑이는 물소리, 찌가 미세하게 떨리는 감각,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이름이 오늘의 목적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사는가. 소중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미처 건네지 못한 안부, 스쳐 갔지만 마음속에 오래 남았던 얼굴들. 낚시를 하며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찬 기운은 뺨을 스치고 손끝을 저리게 만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따뜻했다. 어떤 감정은 바람보다도 더 차갑고, 또 어떤 기억은 눈보다도 더 투명하다. 그런 감정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내가 아직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내 안에 아직 따뜻한 무엇이 남아 있다는 게 기뻤다.
해는 어느새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얼음 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고, 나는 그 그림자 안에서 또 다른 나를 보았다. 어쩌면 이 낚시터에 앉아 있는 나는 내 인생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무엇인가를 바라며, 하지만 그것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으며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 낚시란 본래 그런 것이었을까. 결국 그것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행위이자, 기다림 속에서도 나를 놓지 않으려는 의지이자,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를 안아주는 방식이 아닐까. 얼음 아래에서 물고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세상 어딘가에서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보이지 않는 진실을 믿고 찌를 응시하는 행위는, 마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날 나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낚지 못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겨울 햇살이 따뜻했고, 장화를 벗는 순간 발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생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 속엔 묵직한 평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다시 얼음 위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나를 마주할 것이다. 그건 낚시라는 이름의 사색이자,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용서이며, 결국은 나 자신을 안아주는 시간일 것이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한겨울 얼음 위에서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건 고요 속에서 겨우 듣게 되는 내 안의 목소리이고, 내가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