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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아 붕어를 기다리며

by 남반장 2025.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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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나는 그늘을 좋아하게 되었다. 햇살은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주지만, 그늘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머물게 한다. 여름 끝자락, 무더운 한낮을 피하기 위해 작은 강가의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짙은 초록의 잎들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 나는 낚싯대를 조용히 드리운다. 물살은 느릿하게 흘렀고, 햇빛은 수면 위에서 반짝이며 흘러갔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오직 나와 붕어, 그리고 물소리와 바람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세상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낚시는 이런 날을 위해 있는 게 아닐까.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고, 그 어떤 판단도 요구받지 않으며, 그저 존재만으로 충분한 시간. 낚시는 늘 붕어를 기다리는 일이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진짜 내가 깨어나곤 한다. 찌는 가만히 떠 있고, 나는 그 찌를 바라보며 시간을 잰다. 시계의 초침이 아닌 마음속의 파동으로. 내가 낚시를 시작한 건 단지 취미 때문은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삶이 너무 빠르다고 느껴졌고, 내 속도가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연히 찾은 낚시터에서 처음으로 붕어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고, 그 조용한 경험이 나를 잡아끌었다. 말이 사라지고,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는 그 공간은 나에게 쉼이자 사색의 공간이었다. 오늘도 나는 그 사색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찌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지나온 날들의 후회, 어쩌면 이룰 수 있었을 어떤 가능성, 지금 놓치고 있는 아주 작은 기쁨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불확실함까지. 그런 모든 것들이 물처럼 내 안에서 일렁인다. 낚시란 물고기를 낚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잔물결을 들여다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늘 아래에서 나는 말을 줄인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고, 물결이 반응하며 찌가 미세하게 떨린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나에게 말을 건다. 오늘은 바람이 차다고, 수온이 내려갔다고, 붕어들이 조심스러워졌다고. 나는 말없이 그들의 말을 듣는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어쩌면 이런 감각일지도 모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 이성과 논리로 가둬둘 수 없는 마음의 결들. 낚시터의 그늘은 그런 것들을 되살려준다. 나는 그 아래서 말없이 생각하고, 느끼고, 나를 정리한다. 그러다 보면 붕어가 찌를 툭 건드리는 순간, 그 미세한 진동이 내 몸 전체로 퍼진다. 그것은 물고기가 주는 신호이자, 나에게 보내는 대답 같다. 너는 지금 잘 가고 있다고, 이렇게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고. 나는 낚시터에 오면 늘 하루를 통째로 보내곤 한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곳. 해가 중천에 떴다가 기울고, 바람이 바뀌고, 빛의 각도가 변할 때마다 나는 묵묵히 찌를 바라본다. 점심도 대충 때우고, 핸드폰도 꺼놓은 채 세상과의 연결을 끊는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모두 잊는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지 않느냐고.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지루하지 않다고. 왜냐하면 그 기다림 속에 나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소음 속에선 들을 수 없던 내면의 소리가, 낚시터의 그늘 아래선 또렷이 들린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금 어떤 감정 속에 머물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조용한 목소리다.

 

오늘도 붕어는 쉽게 입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게 불만스럽지 않다. 오히려 기다림이 길수록 내 마음의 결이 더 고와지는 느낌이다. 찌가 잠시 스르륵 움직였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며 깨어났고, 허탕이었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숨을 고른다. 그런 반복이 오늘 하루를 채운다. 누군가에겐 소모적인 시간일 수 있지만, 나에겐 회복의 시간이다. 그늘은 태양이 만든 가장 깊은 안식처이고, 붕어 낚시는 그 안식처에서 나를 회복시키는 조용한 의식이다. 사람들은 말로 위로를 전하지만, 붕어 낚시는 침묵으로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그 침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나를 감싸준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이 그늘 아래에서의 한 장면은 내 안에 오랫동안 남아, 삶이 벅찰 때마다 다시 떠오를 것이다. 붕어를 낚았든, 낚지 못했든, 나는 오늘 내 마음의 그늘에서 붕어처럼 느릿하게 숨 쉬었다. 낚시는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곧 사색이다. 세상은 자꾸만 빠르게 변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더 많은 말과 판단을 요구받지만, 이런 느린 시간, 이런 조용한 그늘 아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말없이 떠 있는 찌처럼,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한 날들이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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