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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강둑에서, 물빛에 잠긴 옛사랑을 보다

by 남반장 202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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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둑을 따라 걸었다. 낚싯대 하나 메고, 어깨엔 낡은 배낭을 걸친 채, 이른 아침의 안개가 바람에 흩어지는 틈을 타 강가로 향했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강물은 그보다 더 무심한 색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낚시가 목적이었지만, 정작 낚이고 싶은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물가에 앉아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었다. 마음속에 쌓인 사연들은 꼭 물속의 돌처럼 무겁고 깊게 가라앉았고, 나는 그것들을 더 이상 끌어올릴 필요도 없고, 끌어올릴 힘도 없다는 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늦가을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휘게 만든다. 잎이 지고, 바람이 불고, 들풀마저 기울어진 채 고개를 숙이면, 사람도 조용히 자신을 숙이게 된다. 나는 그 강가에 앉아, 옛사랑 하나를 떠올렸다. 이따금 그 사람을 생각한다. 너무 자주도 아니고, 너무 뜨겁지도 않게.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을 넘기듯, 조용히, 조심스레. 사라진 사람은 말이 없고, 그래서 잊는 일도 조용하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며 무뎌진다지만, 어떤 감정은 흐름을 거스른다. 물결 위를 떠도는 빛처럼, 그 사람은 지금도 가끔 내 감정의 수면 위에 부서지듯 스며든다. 찌를 던지고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옷깃을 타고 지나간다. 바람에도 온도가 있다. 이 계절의 바람은 뺨을 스치며 말한다. 기억하라고. 잊지 말라고. 가을마다 되풀이되는 이 바람은 마치 계절의 유언 같아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바람에 마음을 열고 만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늦가을도 떠올랐다. 우리는 바람 부는 강가를 함께 걸었고, 말없이 낚시를 하며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그 사람은 낚시보다 풍경을 더 좋아했다. "물은 흘러가지만 마음은 흘러가지 않더라"고 말하던 그 음성이, 지금도 내 귓가에서 균열처럼 맴돈다. 사라진 사랑은 끝이 아니라 흐름이다. 어디론가 떠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른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낚시는 그런 모양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수면 위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행위는 결국, 내면의 울림을 듣기 위함이다. 나는 찌의 움직임보다 더 미세한 내 감정의 흔들림을 지켜보며, 시간이 만든 나라는 강을 조용히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고기가 낚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애초에 고기를 잡으려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내 마음의 조각 하나를 이 늦가을의 강물에 띄워 보내기 위해 왔고, 그 조각이 물살을 타고 어딘가로 사라지기를, 혹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랐다. 그건 그 사람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모든 낚시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날의 낚시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며, 거의 종교적인 의식처럼 느껴진다. 특히 이런 계절,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가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기억을 되짚고, 때로는 흘리는 눈물을 숨긴 채 바라보는 수면은, 거울처럼 과거를 비춘다. 그리고 그 거울은 깨지지 않고, 오히려 나를 더 투명하게 만든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사랑일수록 말보다 침묵으로 기억되고, 침묵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늦가을의 물빛이 그러하듯, 그 사람도 말없이 내 안에서 고요히 머물러 있다. 나는 찌를 거두며, 강물에 손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손끝을 감싸며 현실감을 일깨운다. 그토록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문득 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아픔조차도 감사하다. 그 사람과의 기억이 아직 내게 아픔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사랑이 단순한 지나침이 아니었다는 증거이니까. 세상은 변하고, 강물은 흐르고, 나이도 들었지만, 어떤 감정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빛난다. 나는 그 감정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인다.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찌를 다시 던지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낚시와 닮았다. 물고기처럼 한순간 입질을 주고는 사라지며, 가끔은 잡히기도 하지만 결국엔 놓아줘야만 한다. 강물은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듯하지만, 실은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그 사람도, 그날의 온기도, 지금의 나도. 해가 조금씩 떠오르고, 물빛이 변했다. 노랗게 물든 들판과 갈대밭 너머로 빛이 스며들고, 수면 위엔 은색의 잔물결이 일렁인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빈 손이지만 가득 채워진 기분이었다. 오늘의 낚시는 성공이었다. 물고기가 아니라 기억을 낚았고, 사랑을 낚았으며,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인생의 늦가을은 어떤 느낌일까. 언젠가 내가 진짜 그런 계절을 맞이하게 되면, 오늘 같은 하루를 떠올릴 것이다. 찬 바람, 잿빛 하늘, 말없이 흐르는 강물, 그리고 그 위에 잔잔히 부서지던 그 사람의 얼굴. 이 계절은 지나가고, 또다시 새로운 시간이 오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매번 또 다른 나를 낚고, 다시금 살아갈 이유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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