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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 속의 이름 없는 자리

by 남반장 2025.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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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는 기억처럼 떠오른다. 눈앞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손에 닿지 않고, 분명히 보이는데도 이내 사라진다. 새벽 저수지 위에 피어오른 물안개는 그래서 더욱 내 마음을 닮았다. 나는 여느 날처럼 이른 새벽 낚시터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뺨에 스치는 차가운 입자들, 발끝으로 전해지는 습기의 무게, 그리고 짙게 깔린 침묵의 농도. 누군가 나를 부르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미 이곳에 있었다. 나를 향해 열리는 어떤 자리. 이름도 없고, 좌표도 없지만, 어쩐지 나는 늘 이곳을 기억한다. 아니, 이곳이 나를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낚싯대를 펴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침묵이 아니라 일종의 경건함이었다. 새벽 물가에서 나는 늘 말이 없어지고, 생각은 느리게 굴러간다. 이른 바람이 살짝 스쳐가면 수면 위 물안개가 흐느적거리듯 흩어지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를 잊는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어떤 사람이고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잊는다. 그저 하나의 존재로, 그저 살아 있는 생명으로, 그저 여기에 있다는 감각만으로 존재하게 된다.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도시에서는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출근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말의 정확성을 고민하고, 관계의 방향을 조율하며 산다. 누구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일을 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지만 물안개 속에 앉으면 그런 것들이 모두 희미해진다. 스스로를 향해 던졌던 질문들이 물속에 빠져 버린다. 대신 더 깊고 본질적인 감각이 남는다.

안개-호수-사진

 

숨을 쉬는 일, 바람을 느끼는 일,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 나는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실제 무게를 알게 되었다. 낚싯대를 바라보는 긴 시간 동안,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의 사람. 그의 이름은 이제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나를 떠난 후로 그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연락할 방법도 없다. 하지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 자리에서는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와 나 사이에도 안개가 있었다. 이해하지 못한 채, 설명하지 못한 채, 서로를 놓아야 했던 순간. 그때는 그것이 안개인지도 몰랐다. 안개는 항상 그렇게,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 때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이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옆자리를 흘끗 바라보곤 한다. 아무도 없지만, 어떤 그림자가 앉아 있는 듯한 느낌. 말없이 함께 있던 시간들이 물안개 속에서 다시 피어난다. 찌는 조용히 떠 있다. 바람도 멈췄고, 새도 날지 않는다. 마치 시간마저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하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듣는다. 아무도 없는 자리, 이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이름 붙이려 애쓴다. 사랑도, 슬픔도, 고통도, 희망도. 그리고 그 이름 안에 가둬버린다. 하지만 물안개는 말한다. ‘무명이어도 괜찮다.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흐르도록 두어라.’ 나는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을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관계의 이유, 감정의 동선, 실패의 원인. 그러나 지금 나는 안개 속에 앉아 이해보다는 느끼고 있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감정. 그것이 바로 존재의 증거이자 생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낚시는 시간의 미학이다. 찌가 움직이지 않아도 낚시는 이어진다. 오히려 움직임이 없는 그 시간이 가장 깊은 사색의 터널로 나를 데려간다. 물속에서 고기가 유영하고 있을까, 이 자리는 과연 붕어가 머무는 곳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잊는다. 이 자리에서 낚지 못해도 나는 얻는다. 마음을 건져 올리고, 기억을 끌어 올리고, 어쩌면 나 자신을 다시 건져 올린다. 그러니까 낚시란 삶을 회복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잠시 물러나, 나를 회복하는 조용한 의식. 찌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낚싯대를 살짝 든다. 허공을 가르는 동작, 그리고 다시 고요. 입질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떨렸다. 그 떨림은 어쩌면 지금도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잊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물안개 속에서는 그 잊힌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이름을 잃은 관계, 말하지 못한 감정, 끝내 건너가지 못한 마음들. 그 모든 것들이 내 곁에 머무른다. 낚시는 나를 위해 기억하는 시간이다. 남들은 결과를 묻지만, 나는 과정을 말하고 싶다. 낚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은 이미 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며 물안개는 점차 걷힌다. 이제 다시 세상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물안개 속에 앉았던 그 시간이야말로 나를 가장 솔직하게 비춘 거울이었다는 것을. 이름 없는 자리,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공간에서 나는 진짜 나와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그 어떤 결과보다 깊은 울림으로 내게 남는다. 언젠가 또다시 길을 잃는 날이 오면, 나는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물안개는 언제나처럼 날 반겨줄 것이고,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조용히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찌 하나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속삭이겠지. “괜찮다. 너는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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