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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따라 흘러간 날들(낚시터에서 만난 시간의 얼굴)

by 남반장 2025.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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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낚싯대를 들고 길을 나선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늘, 바람, 강물인데도 그 길이 언제나 새로운 건 나 자신이 늘 같지 않기 때문이리라. 낚시터로 향하는 길은 마치 오래된 골목 같다. 수없이 지나쳤지만 매번 다른 기억이 떠오르고, 다른 생각이 흐르고, 다른 계절이 스며든다. 오늘은 바람이 조금 거칠다. 옷깃을 여미고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이 바람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섞여 있을까.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눈물, 흩날린 꽃잎과 부서진 꿈, 다 하지 못한 말들과 떠난 사람의 기척까지. 바람은 늘 시간의 얼굴을 하고 스쳐간다. 낚시터에 도착하면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하다. 도시는 저만치 밀려나고, 인간 세상의 소음도 물러난다. 여기는 오직 자연과 나, 그리고 흐르는 시간뿐이다. 의자에 앉아 낚싯대를 편다. 찌를 띄우고 기다리는 그 순간, 나는 더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물결 위에 뜬 찌는 나의 감정이고, 내 안에 머물던 긴장과 불안은 강물로 녹아 흐른다. 낚시는 단지 물고기를 낚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의 대화이고, 스스로를 건져 올리는 일이다. 찌는 미동도 없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 내겐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그 고요는 내 마음을 씻는다. 세상은 너무 빠르다.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를 향해 달리고, 앞서 나가야만 안도하고, 끊임없이 채워야만 안심한다. 하지만 여기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가장 충만해진다. 나를 향한 시간, 나를 위해 멈춰주는 자연, 그리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고요. 낚시를 하며 나는 과거를 자주 떠올린다. 특히 오늘 같은 바람 많은 날엔 더욱 그렇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갔던 낚시터, 낡은 자전거에 낚싯대를 싣고 달렸던 여름의 강둑, 비가 오는 날에도 놓지 않았던 기다림의 손끝. 그 시절의 나는 말수가 적고 늘 어딘가 멀리 있는 아이였다. 낚시터에서는 그런 나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누구도 말을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찌만 바라보는 시간이 오히려 가장 자연스러웠다. 그래서일까. 낚시터는 언제나 내게 '안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 슬퍼도 웃지 않아도 괜찮은 곳, 그저 조용히 머물 수만 있으면 되는 곳.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그 바람에 실려 한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사랑했던 사람, 함께 낚시를 가자며 손을 잡고 걸었던 길, 쏟아지는 별빛 아래 건넸던 말들, 그리고 아무런 예고 없이 닫혀버린 계절.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바람을 맞고 있을까. 나처럼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까. 낚시는 기다림이다. 하지만 기다린다고 모두 얻는 것은 아니다. 사랑도, 우정도, 꿈도 그렇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반드시 그 마음이 닿는 건 아니다. 삶은 언제나 어긋나고, 놓치고, 그렇게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이 아프더라도,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사람다워진다. 고기를 낚기 위한 기다림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면을 위한 기다림. 나는 낚시터에서 여러 번 울었고, 수없이 많이 웃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털어낸 눈물들, 고요한 강물 위에 번진 회한의 기색, 그리고 찌가 살짝 흔들릴 때마다 솟구쳤던 희망들.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내 진짜 얼굴이었다. 오늘 나는 그런 얼굴을 다시 꺼내어 본다. 바람은 여전히 분다. 낚시줄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음도 따라 흔들린다. 어떤 날엔 찌가 흔들리는 것조차 아프고, 어떤 날엔 그 찌 하나에도 온 세상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삶은 결국 이런 반복이다. 희망과 포기의 사이, 기대와 체념의 경계,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견디게 해주는 '기다림'이라는 한 단어. 나는 낚시를 하며 그것을 배운다. 세상은 바뀌지 않지만, 내가 바뀐다. 고기를 낚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찌를 바라보며 멈춰 있던 시간들이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만나고, 다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찌가 크게 흔들렸다. 물결이 아닌, 분명한 입질이다. 낚싯대를 든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생명의 떨림, 그것은 단순한 고기의 몸부림이 아니라 내 안에 되살아나는 기억의 몸짓이다. 나는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냈고, 또 하나의 계절을 건너고 있다. 바람결 따라 흘러간 날들이 지금 이 순간 내 품에 안긴다. 삶은 그런 것이다. 떠난 것들이 다시 돌아오고, 잃은 줄 알았던 것들이 다른 형태로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낚시는 그걸 가르쳐 준다. 고요히, 천천히, 그리고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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