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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향을 읽는 시간

by 남반장 202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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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모호한 시기였다. 해가 짧아지고 아침 공기가 차가워졌지만 아직 겨울이라 하기엔 어딘가 미적지근한 온기들이 들판 위를 맴돌고 있었다. 낚시짐을 챙겨 들고 바람을 등지고 걸어가는 둑길 위, 어깨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 속에는 이미 겨울이 다녀간 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다만 계절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마음의 오래된 틈을 지나가며 그동안 묻어두었던 기억과 감정을 깨우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종종 어떤 자연의 조건을 통해 스스로를 비추곤 한다. 찬 공기, 무심한 바람, 고요한 수면, 그 안에서 흔들리는 찌 하나. 어쩌면 낚시는 그 자체보다도 그런 마음의 투영을 위한 매개였는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향한 곳은 오래전부터 자주 오던 작은 저수지였다. 인적 드문 둑방 너머로 갈대밭이 자라 있고, 물은 깊지 않지만 어느 한 곳에서는 유난히 붕어가 잘 붙는 자리였다.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한 자릿수 붕어 포인트’라 불리며, 짧은 가을 해가 지는 무렵이면 자주 굵은 입질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노을-남자-뒷모습-사진

 

나는 늘 이 자리를 찾을 때마다 낚시보다는 기다림을 생각하게 된다. 찌를 세우고 앉은 채로 바람이 흔드는 수면을 바라보며, 왜 이 자리를 택했고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를 되묻게 된다.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한 외로움을 되새김질하는 습관 같은 것이다. 그런 시간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말하지 못한 말, 잊은 줄 알았던 얼굴들, 다 담지 못한 사랑들이 바람을 타고 찾아온다. 낚시터에 불어오는 바람은 늘 의미심장하다. 단지 자연현상의 일부가 아니라, 잊히지 않는 시간의 어떤 숨결처럼 다가온다. 처음 낚시를 배운 어린 시절에도, 첫 입질의 설렘을 간직한 청춘의 어느 날에도, 한참을 떠돌다 돌아와 앉은 날에도, 바람은 늘 내 옆에서 같은 속도로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을 느끼며 낚싯대를 들고 있노라면, 낚시는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를 품게 된다. 찌를 바라보는 눈은 이제 수면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물고기인가, 어떤 깨달음인가, 혹은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인가. 바람은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더 많이 묻고, 더 깊이 침묵하게 만든다. 그렇게 낚시란 결국 사색이며, 찌 하나는 나의 사유가 닿는 끝점이 된다. 바람의 방향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입질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흐름을 읽는 일이다. 지금 이 찬 바람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잃었는가. 생각은 끝이 없다. 낚시는 시간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일과 같다. 오늘처럼 바람이 조금 더 매서울 때, 마음은 더 가볍게 들춰지고, 오래된 기억들이 더 쉽게 드러난다. 낚시를 하며 나는 종종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간다. 떠나간 사람들, 끝내 하지 못한 말들, 놓쳐버린 순간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물속에 가라앉히는 일. 그렇게 한동안 아무 일도 없는 듯 가만히 앉아 찌를 바라본다. 찌는 바람에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내 마음에도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마침내 한 번의 입질이 찾아올 때, 그것은 단지 고기의 반응이 아니라 세상의 응답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들어올리는 낚싯대 끝에서 물살을 가르며 올라오는 것은 단지 붕어 한 마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껏 쌓여온 침묵과 사유가 응축된 하나의 응답이며, 바람의 언어가 물속에서 가시화된 하나의 문장이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손으로 받들며, 잠시 눈을 감는다. 그 손끝의 떨림은 삶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고, 낚시란 결국 기다림 끝에 도달한 작은 깨달음이란 걸 다시금 체감하게 된다. 시간이 더 흐르고 해는 지고,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진다. 나는 낚싯대를 거두며, 오늘 바람이 전해준 말을 되새긴다. ‘멈추지 마라, 기억하라, 그러나 다시 나아가라.’ 낚시터를 떠나는 길, 바람은 여전히 등을 민다. 나는 다시 바람의 방향을 느끼며, 그 바람이 전하는 계절의 무늬와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일도 다시 이 자리에 앉아, 바람을 읽고 나를 읽겠노라고. 낚시는 그렇게 나를 매일 다시 태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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