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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건드린 수면 위로 지나간 날들의 잔상

by 남반장 2025.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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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다녀간 자리마다 수면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일렁임을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내 마음 어딘가가 들춰지는 기분이 든다. 들춰져 잊혔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다시 그 얕은 흔들림 속에서 떠오른다. 낚싯대를 세워놓고 찌 하나를 바라보며 보내는 그 정적의 시간 속에서, 나는 늘 그 잊히지 않는 날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어쩌면 낚시는 시간과 기억의 가장자리를 걷는 일인지도 모른다.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그 고요함 속에서 가장 큰 움직임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누군가는 물고기의 입질을 기다리지만, 나는 오히려 그 기다림을 핑계 삼아 나를 만나러 온다. 바람은 오늘도 강물을 스친다. 물 위의 반짝이는 결이 잠시 파문을 그리고 사라질 때, 나는 그 안에서 오래전 그 사람의 얼굴을 본다. 말없이 강가에 함께 앉아 있던 그 밤, 손등을 스치던 바람과 손가락을 감싸던 그 미온의 온기. 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던 침묵의 시간, 물속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그 무언의 공감. 그 시간이 내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지금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혼자의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자주, 함께 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 누군가의 존재를 더 또렷하게 느끼는 법이다.

물고기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오늘따라 입질도 뜸하고, 강물은 느리게 흘러만 간다. 하지만 나는 초조하지 않다. 그저 바람이 머무는 물결의 리듬에 나를 맡기며, 잊고 지냈던 날들을 떠올린다. 어떤 날은 화창했고, 어떤 날은 비가 왔으며, 어떤 날은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무너졌고, 또 어떤 날은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 모든 날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풍경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물가다. 내 마음이 가장 약해질 때마다 나는 늘 이곳을 찾았고, 붕어를 낚는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끄집어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번 조용히 입질을 기다리는 척하며, 기억의 수면을 가만히 흔들었다. 물속 깊은 곳에서 반짝이며 올라오던 것들은 단지 물고기가 아니라, 내 안에 가라앉아 있던 말들, 지나간 날들, 그리움과 회한이었다.

사람들은 쉽게 잊고 산다. 물고기를 낚은 손맛은 그날 저녁이면 사라지고, 그 찌를 바라보던 시간도 이내 희미해진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정적이 더 진한 기억으로 남는다. 붕어 한 마리도 낚지 못한 날, 텅 빈 살림망을 들고 터덜터덜 돌아가던 저녁 무렵의 회색 하늘, 물비린내가 옷깃에 밴 채 다시 도시의 빛 속으로 사라지던 그 뒷모습. 나는 그런 날들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이 내게는 가장 선명한 시간으로 남았다. 바람이 건드린 수면 위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잔상처럼 흘러가고, 나는 그 잔상 하나하나를 따라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 낚시는 끝이 없는 기다림이지만, 그 기다림 속에는 끝없이 자신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외롭고, 고요하고, 그래서 더 깊이 사색하게 되는 순간들. 오늘 나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다.

강물은 무심하게 흐르고, 찌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내 안의 풍경은 분 단위로 바뀐다. 구름이 가리고, 햇살이 드리워지고, 바람이 지나가고, 새소리가 사라졌다가 다시 시작되고, 그 모든 감각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내 마음에 내려앉는다. 어떤 날은 스스로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찌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이름 모를 무언가에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여기 있는 내가 진짜 나인지, 내가 잃어버린 그 마음은 아직 내 안에 살아 있는지,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 용서받을 수 있을지, 혹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런 고요한 질문들이 낚시라는 이름의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내게 돌아왔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찌는 점점 어둠 속에 묻혀간다. 나는 작은 랜턴을 꺼내 들고 다시 수면 위를 바라본다. 어둠은 낯설지만 동시에 친숙하다. 낮에는 가려졌던 감정들이 어둠 속에서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강가의 밤은 도시의 밤과 다르다. 이곳의 밤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풀벌레 소리, 멀리서 울리는 개구리의 울음, 물속에서 무언가 튀어 오르는 소리, 그리고 내 마음 안쪽에서 또각또각 울리는 생각의 조각들. 이 고요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바람이 있고, 강물이 있고, 지나간 시간이 있고,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감정이 함께 있다. 낚시는 그런 존재들을 다시 끌어올리는 일이다. 살아 있었지만 미처 꺼내지 못했던 감정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내 안에 숨 쉬는 이야기들. 그 모든 것들이 밤의 강가에서 하나씩 드러난다.

돌아갈 시간이다. 낚싯대를 접고, 텐트를 정리하며 나는 다시 한 번 수면을 바라본다. 찌는 더 이상 떠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 남겨진 시간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문다. 바람은 여전히 강물을 쓰다듬고, 그 파문은 점점 퍼져가다 이내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사라짐조차도 어딘가에는 남아 있다는 것을. 오늘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도, 이 기다림 속에서 만나고 흘려보낸 마음들도 모두 나의 일부가 되어 다시 내일을 살아가게 할 것이다. 바람이 건드린 수면 위로 흘러가는 잔상처럼, 나는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듯 보이지만, 가장 많은 것을 마음에 남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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