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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강둑 위에서 배운 침묵

by 남반장 2025.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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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늘 말이 많다. 그날도 바람은 쉬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낚싯대를 둘러멘 채 강둑 위를 걷는 나에게, 귓가를 스치는 바람은 귀엣말처럼 속삭였고, 때로는 외침처럼 몸을 밀어붙였다. 풀잎은 고개를 떨구었다 들었다를 반복했고, 낡은 깃발처럼 흔들리는 내 옷자락은 내가 그곳에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시각적 언어였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안의 목소리마저 잠시 꺼둔 채, 나는 오직 침묵 속에서 강을 바라보았다. 낚시터는 이런 날이면 더욱 넓어 보인다. 바람에 쓸린 물결이 잔잔한 물을 깨트릴 때, 그 조용한 흔들림마저도 살아 있는 듯한 긴장을 품는다. 찌를 던지고 난 후에도 나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물고기가 물어줄까 하는 기대조차 잠시 내려두고, 나는 그냥 침묵을 배웠다. 바람이 전부를 대신해주었고, 나는 그저 그것을 따라 흘러갔다. 사람은 때때로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 한다. 그러나 낚시는 다르다. 낚시는 침묵의 기술이고, 기다림의 언어다. 바람 부는 강둑 위에서 나는 그 오래된 진실을 새삼 떠올렸다. 강은 말이 없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강은 흐르는 방식으로만 존재를 증명한다. 수면은 갈라지고, 풀은 눕고, 갈대는 흔들리지만, 강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 강 앞에서 나는 조용히 나를 들여다본다. 어떤 날은 그 강물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나 오래 나는 스스로를 외면해왔던 걸까. 타인의 말에 휘둘리고, 속도에 쫓기며, 내 안의 목소리를 묻은 채 살아왔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은 강물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바람이 불면 다시 떠오른다. 그러니 바람은 잔인한 동시에 다정하다. 잊었던 감정을 다시 일깨우고, 덮어두었던 생각을 다시 꺼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사유한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 오히려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나는 이 바람 부는 날 낚싯대 옆에 앉아 조용히 꺼내어 본다. 바람은 그런 시간에 늘 함께한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다 아는 듯한 존재.

 

그날의 바람은 유난히 거셌다. 낚싯줄이 바람에 날려 한참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맸고, 던진 찌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모든 불편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똑바로 던지지 않아도 괜찮고, 고기가 물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바람에 흔들리는 낚싯대 끝을 보며 나는 무언가를 내려놓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평소 너무 정확하고 효율적인 삶만을 살아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구불구불한 강줄기, 삐뚤어진 나무, 불규칙한 바람의 방향. 그 불완전함 속에 숨겨진 질서를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속도가 자연과 맞닿는다. 나는 그날 바람을 통해 삶의 곁길을 배우고 있었다. 바람 부는 대로 낚싯줄이 흘러가듯, 때로는 어긋나야 할 자리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말보다 더 큰 교훈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고, 풀숲은 여전히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찌 하나를 바라보며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찌는 흔들렸고, 물속의 그림자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른 채 사라졌다. 어떤 움직임은 진짜였고, 어떤 움직임은 바람의 장난이었다. 삶도 그렇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설레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혹은 헛된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 침묵 속에서 다가오는 진실은 말보다 훨씬 강하다. 그날 강둑에서 배운 침묵은 그런 의미였다. 세상의 소음과 바람의 속삭임을 구분할 수 있는 귀. 그것은 오직 기다림 속에서 자라는 감각이었다. 나는 찌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내 안의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고요했지만 깊었다.

 

바람은 밤이 가까워질수록 더 거세졌다. 강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고, 나는 손에 감긴 낚싯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 모든 침묵의 무게를 느꼈다. 고기는 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날 낚시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을 낚았다. 바람 속에서 침묵을 배우고, 그 침묵 속에서 내 안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은 고기를 낚는 것보다 더 오래 남는 깨달음이었다. 낚시는 종종 사람을 고요하게 만든다. 단지 기다림 때문만은 아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내 안의 불안과 조급함, 욕심과 아쉬움을 천천히 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가며 먼지를 털어내듯, 자연스럽고 조용한 정화의 과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바람은 여전히 귀에 머물렀다. 차창 너머로 강이 멀어지고, 도시의 불빛이 가까워져도, 나는 여전히 강둑 위에 남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침묵은 여운이 길다. 말은 사라지지만, 침묵은 남는다. 바람 부는 날, 나는 말 없는 자연에게서 가장 깊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 위로는 어떤 말보다 더 오래 내 안에 남았다. 낚시란 결국 침묵을 배우는 일이다. 바람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기다림 속에서 삶을 들여다보는 일. 그 모든 것이 강둑 위의 한 사람에게 묵직한 진실로 다가온다. 나는 또다시 바람 부는 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날, 다시 침묵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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