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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 대신 사라진 사랑을 떠올리게 한 낚시

by 남반장 202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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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떠난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를 알게 된 건 아주 오래된 저수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붕어 한 마리 잡기 위해 들고 나왔던 낡은 낚싯대, 버릇처럼 챙긴 미끼와 바늘, 무릎 아래 깔린 조용한 풀숲들, 그리고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부드러운 바람. 세상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듯한 고요한 순간이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오래된 사랑을 꺼내 보고 있었다. 이 계절, 이 시간, 이 바람과 빛과 물결의 결이 어쩐지 그녀와 함께했던 어떤 날과 겹쳐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지나갔고, 그녀는 사라졌으며,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흔적처럼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이따금 나를 멈춰 세운다. 붕어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으로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때 그 저수지의 풍경이 나의 기억과 조우하며 조용히 울려 퍼졌고, 사랑은 낚시처럼 그렇게 다시 떠올랐다.

사랑은 생각보다 낚시와 닮아 있다. 첫눈에 반한 찌의 떨림처럼, 어느 순간 문득 마음이 흔들리고, 그 떨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세우고 시선을 집중시킨다.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고, 마음을 담은 말을 던지며 천천히 관계를 풀어낸다. 그러나 언제나 바람처럼, 수면 아래 흐름처럼, 사랑은 잡히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가끔은 그것이 영영 손에 쥘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낚싯대를 드리우듯,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끈질기게 기대고 또 기다리게 된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한때 연결되어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떨림에 귀 기울였고, 함께한 날들 속에서 웃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어딘가에서 실을 놓쳐버렸고, 관계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붕어 한 마리보다도 가벼운 말 한마디에, 혹은 말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에 의해.

그녀가 떠나고 난 뒤에도 나는 낚시터를 자주 찾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현실도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도시의 빌딩 사이에선 기억이 부딪혀 아프게 다가왔지만, 물가의 고요함 속에서는 그것들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붕어가 물고기를 무는지, 찌가 흔들리는지,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낚싯대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시간 동안에만큼은 그녀를 다시 떠올려도 괜찮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아무런 간섭 없이. 그러다 문득, 물 위에 비친 내 얼굴이 그녀를 닮아 보일 때가 있었다. 사랑은 때로 그렇게 살아남는다. 기억으로, 습관으로, 몸의 작은 제스처로, 바람이 스치는 순간의 냄새로.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정적이었고, 그 정적은 물처럼 스며들어 나를 감쌌다. 다시는 붕어를 낚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허함이 겹쳐졌지만, 나는 낚싯대를 놓지 않았다. 찌 하나 바라보며 고요를 견디는 일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처럼 의미 있다고 믿었다.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나지만, 그 사람이 내게 남긴 감정은 나의 일부가 되어 끝없이 반복되는 계절과 함께 되살아났다. 어느 날은 붕어처럼 떠오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수면 밑으로 조용히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 감정의 흐름에 익숙해질 즈음, 나는 비로소 낚시라는 행위가 단지 고기를 낚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기다림의 예술이며, 자신의 속도를 되찾는 일이며, 지나간 것과 화해하는 방법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첫 낚시는 봄이었다. 조용한 강가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물을 바라보며, 가끔 눈이 마주치면 피식 웃곤 했다.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처럼 느꼈다. 그때의 공기는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바람의 촉감, 햇살의 온도, 그녀의 옆모습, 미끼를 다는 손길,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붕어보다 더 선명하게 내게 남아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우리는 다른 시간 속에 있지만, 낚싯대를 들면 그 장면들이 다시 떠오른다. 사랑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이 있었던 시간은 여전히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 찌 끝에 반짝이는 물방울 하나조차, 그녀와 함께했던 날의 잔상처럼 느껴진다. 나는 오늘도 그 기억을 잡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운다. 물고기를 낚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리고 내가 한때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되새기기 위해서.

물은 흘러가고 계절은 바뀌며 사랑은 지나간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돌아온다. 낚시터의 물결처럼, 바람결에 실린 향기처럼, 잠들기 전 문득 떠오르는 기억처럼.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사랑은 떠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내 안에 남긴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낚시를 한다. 사라진 사랑을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 찌는 조용히 물 위에 떠 있고,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다시 그녀를 떠올린다. 오늘도 붕어는 잡히지 않을지 몰라도, 이 밤의 적막 속에서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건졌다. 그것이 사랑의 잔상일지, 스스로에 대한 연민일지, 혹은 지나간 시간을 향한 작별 인사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기다림은 의미가 있다. 낚시는 그런 것이다. 끝없이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잡지 못하더라도 그 기다림 자체가 삶의 일부가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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