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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의 강가 – 젖은 마음의 무게

by 남반장 202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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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잔잔히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자 조금 더 굵어졌고, 나는 예정에도 없던 짐을 챙겨 다시 강가로 향했다. 비 오는 날은 낚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비가 내리는 날이 가장 고요하게 낚시할 수 있는 날이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시간, 자연의 모든 소리가 비에 녹아들어 서로를 덮어주는 그 적막함 속에서 나는 묵직한 마음 하나를 들고 나를 마주하러 간다. 낚싯대를 드리우기 전부터 이미 이 자리는 나를 위한 무대가 된다. 젖은 흙 냄새, 풀잎 위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 빗방울이 수면을 두드리며 만드는 무수한 동심원, 그리고 그 안에 비치는 나의 뒷모습. 낚시는 종종 무엇을 잡기 위한 행위처럼 여겨지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오히려 무엇도 얻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게 된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를 기억하며 이 자리에 앉았다. 그 누군가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기억이며,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적시는 비처럼 온전히 나를 감싸는 존재이다. 빗방울이 텐트의 천장을 때릴 때마다 기억은 조금씩 되살아난다. 그와 함께 걸었던 비 오는 날의 거리, 우산을 씌워주며 아무 말 없이 걷던 그 공기의 냄새, 어깨를 스쳐가던 촉감, 머리카락을 적시던 물기.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이 강가에서 나는 더 이상 낚시꾼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혹은 단절된 시간을 조용히 붙들고 있는 어떤 존재가 된다. 찌는 빗속에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부유하고 있다. 집중하려 해도 자꾸만 눈이 감긴다. 감긴 눈 뒤로 스며드는 수많은 장면들, 말하지 못했던 말들, 지나친 시간들. 비가 내리면 우리는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빗소리는 우리의 외면을 씻어내고, 가장 여린 감정들마저 드러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비를 좋아하고, 이 침잠하는 하늘빛 아래에서 나를 꺼내어 본다.

 

오늘따라 낚싯대를 붙잡은 손이 무겁다. 아니, 손이 무거운 게 아니라 마음이 그런 것 같다. 이따금 입질이 온다 해도 챔질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물고기가 아닌 나를 흔드는 어떤 신호처럼 느껴진다. 모든 걸 끌어올릴 자신이 없어서, 때론 그 입질을 모른 척한 채 놔버린다. 놓치면 사라질 것 같고, 잡으면 무너질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이 있다. 나에게 낚시는 단지 고요한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사람과 나눈 시간들을 다시 가늠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이다. 그리고 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에는 그 과정이 유난히 힘겹다. 물비린내보다 더 짙은 건 바로 내 안의 그리움이다. 작은 의자에 앉아 등허리를 구부린 채 한참을 있었더니, 엉덩이도 허리도 모두 젖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긴다. 이런 감정의 무게를 가볍게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비에 젖은 옷처럼, 나도 오늘은 무겁게 젖어 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들도 마를까. 아니면 더 스며들어 나를 한 겹 더 감싸게 될까. 강은 변함없이 흐르고, 빗방울은 쉼 없이 떨어진다. 빗소리와 강물 소리, 내 안의 목소리가 뒤섞여 어느 것이 밖이고 어느 것이 안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나는 이제 경계 없는 공간에 존재하는 하나의 무늬가 된 듯하다.

 

사람들은 왜 낚시를 하는지, 왜 그토록 조용히 긴 시간을 보내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많은 말을 듣는다. 지나간 사랑이 속삭이는 말,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 내가 듣고 싶었던 말, 그 모든 목소리가 이 비 오는 강가에서 울린다. 낚시란 고요한 대화이고, 침묵 속에서 울리는 심장의 박동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그는 비를 좋아했지만 비 오는 날엔 외출을 꺼렸고, 나는 비를 싫어했지만 그가 좋아하면 따라나섰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젖어들었고, 결국엔 너무 젖어 무너져버렸다. 지금 나는 다시 젖은 풍경 속에 앉아 있다. 그러나 이 젖음은 더 이상 파괴가 아닌 회복이다. 잊으려 하지 않고, 붙들려 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비처럼 마음을 통과하게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된 나의 방식이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서 강물의 빛이 묘하게 은빛으로 변해간다. 찌는 그 은빛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빗방울이 조금씩 잦아든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고, 풀잎이 제 몸을 털 듯 흔들린다. 나는 아직 한 마리의 붕어도 낚지 못했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오늘, 마음을 낚고, 시간을 낚고, 다시 나를 낚았다. 낚이지 않은 찌 대신, 나의 마음이 수면 위에 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끝내 품어 안는다. 강가는 이제 비에 젖은 흔적을 남기고 다시 평온해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젖음은 쉽게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 젖음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들이 얼마나 깊은지를, 그리고 그것이 나를 얼마나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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