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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아래의 고요 – 녹아내리는 풍경 속에서

by 남반장 2025. 5. 3.

겨울의 끝자락은 어쩐지 애틋하다. 봄의 문턱에 닿았지만 아직은 겨울이 남아 있는, 낡은 계절의 잔재들이 마치 내 마음의 일부처럼 곳곳에 머물러 있다. 얼어붙은 물가에 서면, 이별하지 못한 계절이 아직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오래된 낚싯대를 들고 천천히 얼음 위를 걷는다. 두텁게 언 얼음 사이로 금이 가기 시작했고, 물가의 가장자리는 이미 제 모양을 되찾기 시작했다. 얼음 아래 들려오는 소리는, 겨울이 흘려보내는 마지막 숨결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 숨결 위에 앉았다. 무언가를 낚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소리와 함께 조용히 앉아 있고 싶어서. 얼음 아래의 소리는 낮고 둔중하며, 때때로 멀리서 부서지는 얼음의 파편 같은 것이 되어 내 안의 기억과 부딪힌다. 나는 오래전 잃어버린 어떤 이름을 떠올리고, 그와 함께 웃던 나날의 조각들을 다시 붙잡는다. 사라진 사람과 다시 나란히 걷는 상상을 하며, 나는 얼음 위에 묵직한 침묵을 드리운다. 그 침묵은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내 몫이다.

낚시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나는 점점 그것이 기억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 나를 가두고, 그 안에서 천천히 무너지는 침묵을 듣는 일. 낚싯대를 세우고, 찌를 띄우며 나는 내 마음의 물살을 들여다본다. 얼음 아래로 스며드는 햇살이 조금씩 강해지고, 그 빛은 마치 과거를 비추는 조명처럼 아련하다. 나는 내가 잊으려 애썼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고, 잊지 말아야 했던 일들이 다시 떠오른다. 낚시터의 고요함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의 소리를 더 크게 만든다. 어쩌면 낚시는 바깥의 소음을 멀리하고 내면의 잡음을 정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은 어쩌면 내 안의 상처일 수도 있다. 겉으로는 단단히 얼어붙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흐르고 있는 감정이 있다. 나는 그 감정과 마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물고기일까, 과거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나 자신일까.

내가 처음 낚시를 배웠던 날은 봄이었다. 얼음은 이미 녹아 있었고, 강물은 넘칠 듯이 출렁거렸다. 나는 물고기를 낚는 일보다 찌를 바라보는 그 시간에 더 많은 감동을 느꼈고,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내 호흡의 속도로 움직이는 그 시간이 처음으로 나를 위로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 나는 다시 얼어붙은 물가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다. 매년 같은 계절이 오지만, 같은 봄은 없다. 그 속의 나는 늘 다른 내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른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낚시였다. 얼음 위에 앉아 멀리서 들려오는 철새의 울음을 듣는다. 그것은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는 소리 같았다. 계절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고, 나는 그 이별의 풍경 속에 나를 녹여내고 있었다.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말들이 천천히 녹는다. 말로 꺼낼 수 없던 그 마음들은 얼음 아래 흐르는 물결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나는 그것들을 낚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흘려보낸다. 붙잡으려 했던 것들이 결국 나를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얼음이 녹고 있는 그 순간에도 찌는 잠잠하다. 나는 낚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를 하지 않기로 한다. 인생의 많은 순간이 그렇듯, 얻지 못한 것들은 때로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고요함 속에서 나는 나를 돌아보고, 나를 조금 더 받아들인다. 낚시는 그렇게 나를 다시 만드는 일이다. 흙탕물이 가라앉듯, 내 안의 혼란도 천천히 자리를 잡는다. 얼음은 계속 녹고 있고, 물가에는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변화는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내 마음에도 번진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나는 나를 다듬고, 버릴 것을 버리고, 남길 것을 남긴다. 낚싯대를 들고 일어설 즈음, 나는 더 이상 과거를 붙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은 흘러가야 하고, 나는 이제 흘려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다시 뒤돌아본다. 얼음 위에 앉아 있었던 나 자신이 보인다. 침묵 속에서 많은 말들을 쏟아냈고, 그 말들은 이제 얼음 아래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낚지 못했지만, 나는 오늘 가장 진실한 나를 만났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낚시는 언제나 그런 선물이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가장 깊은 움직임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고요한 얼굴로 많은 소란을 감추고 살아간다. 낚시는 그 소란을 꺼내어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이었는지,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리게 한다. 나는 다시 봄을 맞을 것이다. 얼음이 다 녹고, 물가에 따뜻한 바람이 불면 나는 또다시 낚싯대를 펼칠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오늘과는 또 다른 나일 것이다. 그래서 낚시는 끝없는 시작이다. 계절이 바뀌고, 나는 늙어가고, 세계는 변해가지만,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찌 하나에 나의 하루를 맡긴다. 그리고 그 찌를 바라보며 오늘도 내 안의 얼음을 녹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