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이 막 밀려오는 시간, 낚시 장비를 어깨에 메고 천천히 논길을 걸어갔다. 이 길은 무수한 시간 속에서 내 발걸음과 함께 늙어온 길이다. 철 지난 논두렁을 지나는 동안 이슬에 젖은 풀잎들이 바짓단을 적셨고, 새소리도 아직 들리지 않는 이른 시각, 나는 오직 내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만을 친구 삼아 낚시터를 향했다.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발걸음이 주춤할 이유는 없었다. 낚시는 누군가와 함께여도 좋지만, 혼자인 시간이 더 많고도 깊은 법이니까. 나무 사이로 비치는 새벽빛이 물가에 닿자, 낚시터는 마치 숨죽인 듯 고요했다. 찌꺼기 하나 떠오르지 않는 물가, 수면 위에 그림자 하나 얹히지 않은 정적 속에서 나는 낚싯대를 편다. 이 정적은 나를 무너지게도 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낚시터는 거울이다. 내가 얼마나 비어 있는지를,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를 그대로 비추어준다. 찌 하나 물 위에 띄우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이미 나는 충분히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입질은 오지 않았다. 찌는 작은 물결조차 피하며 선명한 선으로 떠 있었다. 시선을 그 찌에 고정하고 있으려니 점점 내 시야는 흐려지고, 어느새 마음이 멀리로 떠나간다. 어릴 적, 처음 낚시를 배운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아무것도 낚지 못한 채 하루를 다 보냈고, 그날 저녁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그래도 좋지 않았니? 고요해서." 그 말이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해가 바뀌고, 내가 자라고, 다시 홀로 낚싯대를 잡으며, 그 말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낚시는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잡는 일이라는 것. 아무것도 낚지 못한 날,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건져 올릴 수 있다는 역설. 나는 오늘 그런 날을 살고 있었다. 찌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는 무언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이곳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고집이 아니라, 그냥 여기에 머무는 것이 맞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낚시에는 직관이 필요하다. 단순히 물고기의 습성을 이해하는 것 이상의 어떤 감각,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확신 같은 것. 찌가 미동도 없는데도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은 날은 바로 그런 감각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고, 햇살은 조금씩 수면 위를 따뜻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주변의 새들이 하나둘 아침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배는 고파오고, 허리는 아파왔지만 이상하게도 짜증은 나지 않았다. 그것이 낚시가 주는 묘한 마법이다. 기다림의 고통이 아니라 기다림의 평화를 배워가는 일. 그것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단지 홀로 고요히 오래 앉아본 사람만이 알아차리는 법이다.
손맛은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오랜만에 따뜻한 무언가가 퍼졌다. 그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감정과 닮아 있었다. 꼭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만나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은 그런 기다림. 그저 거기에 있을 수 있어서 좋은 존재. 나에게 낚시가 그렇다. 그래서 손맛이 없는 날조차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 빈 손으로 돌아서도 나는 언제나 마음은 채워져 있다. 낚시터에서 흘린 시간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나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찌는 물속을 들여다보는 창이다. 그 창을 통해 나는 물고기뿐 아니라 나 자신도 들여다본다. 때론 그 안에서 초라한 내 모습을 보기도 하고, 때론 지나온 시간의 그림자를 마주하기도 한다. 낚시를 하며 나는 살아온 날들을 다시 펼쳐본다. 아픔도 있고 기쁨도 있었던 시간들. 물고기를 기다리듯 누군가의 용서를 기다렸던 날들. 찌가 꿈틀대듯 나도 흔들렸던 밤들. 그런 기억들이 물안개처럼 마음에 번진다.
점심이 훌쩍 지나고 해가 낮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입질 한 번 없이 하루가 저물어간다. 낚시꾼에겐 흔한 일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아쉬움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것마저 나는 사랑한다. 아쉬움을 남겨두는 날이 더 오래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찌를 걷고 낚싯대를 접었다. 물속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하루, 그러나 내 안에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침묵의 무게, 고요의 깊이,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 할 삶에 대한 짧은 깨달음. 낚시터는 늘 나에게 말없이 가르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선생, 가장 무심한 위로자. 나는 오늘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로 인해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돌아오는 길, 발끝에 달라붙은 흙덩이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나는 천천히 걸었다. 어디에도 급할 이유가 없었다. 손은 비어 있지만 마음은 무거울 정도로 가득했다. 어쩌면 이 무게가 내 삶을 지탱해주는 진짜 힘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렇게, 텅 빈 낚시터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침묵이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붕어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지만, 내 안의 고요는 오래도록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그렇게, 다시 나는 살아간다.